훈요십조 배역의 땅은 호남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호남은 고려시대부터 차별받아온 것이므로, 현대사에서 비극적으로 일어난 호남차별 역시 역사적 연장선상에 놓여있을 뿐, 의도적으로 조작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호남차별의 원인이 호남차별을 조장해온 가해자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도록 차별을 받아온 호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결국 차별의 책임마저도 호남에 전가하게 되는 '피해자 탓하기'식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호남 = 배역의 땅'이라는 기존의 해석은 과연 올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이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 해석을 전제로 삼아 파생된 결론 또한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부터 호남차별의 역사적 근거가 되어 왔던 훈요십조에 대해 그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호남지역을 가리킨다?
아래는 호남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는 훈요십조 제8조에 나오는 문제의 구절이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灾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고려사절요』(1), 민족문화추진회,1968. pp.470-471)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에 있는 주나 군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국척과 혼인하여 권력에 결탁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근대에 들어와 훈요십조를 처음 해석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 龍)라는 일인사학자였다. 이마니시는 '차현이남과 공주강외'이라는 문구를 호남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정설처럼 굳어져 호남이 배역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처구니없게도 명백한 오역이었다.
이마니시 류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
1) 첫째, '차현(車峴)'을 지금의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해석한 점이다.
차령산맥은 지금까지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의 북방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뻗은 산맥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2005년에 실시한 국토연구원의 조사 결과 차령산맥은 실존하지 않는 산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달달 암기해 왔던 그 차령산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국토연구원의 설명에 의하면, "차령산맥뿐 아니라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노령 등 여러 산맥도 구릉(언덕) 상태인 것으로 드러나 실제 산맥으로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차령산맥을 포함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산맥체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일제시대 '고토분지'라는 일인 지질학자였는데, 1903년에 일꾼 6명과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그것도 단 14개월 동안 답사하는 것으로 산맥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먹구구 방식으로 측정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산맥체계였던 셈이다. 이것이 조선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령산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따라서, 1903년에 실수로 '만들어진' 차령산맥이 900년 무렵을 살던 왕건의 입을 통해 언급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왕건이 말했다는 '차현이남(車峴以南)'의 차현은 차령산맥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다는 뜻이다.
2) 둘째, '공주강외(公州江外)'를 금강 남쪽으로 해석한 점이다.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으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경계로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인데, 대체로 차령산맥(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곳)과 비슷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이 점에 착안하여 공주강 외(外)라는 표현을 금강 남쪽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마니시의 해석에 대해 설성경은 "'외(外)'는 『한화사전(漢和辭典)』 등에서 「바깥」이라는 의미와 「위(上)」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공주강 외'는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지리적으로 공주강 북쪽을 가리킨다"고 반박했다.
또 'OO以南 OOO外'라는 한문 표현은 '~에서 ~까지'라고 하는 지역적 범위를 설정하는 문구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있어 공주강 북쪽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공주강외를 단순히 금강 남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이마니시의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2. 고려시대 호남사람은 차별 받았나?
1) 호남세력은 배역이 아닌, 왕건의 친위 세력이었다.
왕건은 모두 알다시피 궁예를 왕으로 모신 후고구려의 신하였다. 왕건이 궁예 아래에서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계기가 나주정벌이었는데, 이때 왕건은 나주호족의 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 아내로 맞이하는 등 나주호족들과 굳건한 결속을 맺게 된다. 이후 나주세력은 왕건의 출신지인 개성세력과 함께 왕건을 후원하는 친위세력이 되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2) 오히려 왕건은 호남사람을 중용하였다.
신복룡은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 살아서는 상주국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谷城)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唐津) 사람(또한 광주지방에 근거를 둔 호남 호족 세력이기도 했다)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3) 고려 전반에 걸쳐 호남출신이 공직에서 배제된 적이 없다.
설성경은 태조 사후 즉, 훈요십조의 유훈이 전해진 직후였던 4대 광종부터 8대 헌정 때까지 과거시험관인 지공거를 두 번이나 역임했던 전북 전주 출신의 유방헌을 예로 들며 "태조 사후 후대에도 후백제인이 관직임용에 제한받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4) 왕건은 분열주의자가 아닌 통합주의자였다.
왕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보더라도, 그는 통합을 강조한 통합주의자였지 분열을 획책하여 왕권을 도모하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자신의 라이벌이였던 견훤이 투항해 오자 백관 최상위의 벼슬을 내리며 크게 환대하였다. 그리고 공신과 호족은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들과의 혼약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 왕건은 거란이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설정하여 호족들의 단결을 이끌어내었다. 굳이 내부의 적을 만들어 분열시키고 차별하는 방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시도되는 4대 광종 이전까지 고려 왕권은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는데, 굳이 호남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설정하여 호남 호족들의 반감을 자초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3. 풍수지리적으로 호남은 배역의 땅인가?
조선후기 유학자 성호 이익은 금강을 "반궁수"라 일컬으며 금강 유역 일대를 배역의 형으로 보았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지리'에서 훈요십조를 빗대어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았다.
이익의 주장에 대해 설성경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와 연루된 성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었던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금강은 경주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에 해당된다. 만약 개경을 기준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배류수로 한다면 개경 가까이에 있는 임진강·한강 모두 배류수가 되고 만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해 독설에 가득 찬 이익의 지방 편견을 보아도 그의 풍수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왜곡되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중환의 주장에 대해서 신복룡은 "호남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인물이라면서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이중환)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며,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2) 도선의 비보(裨補)사상이 태동한 호남은 배역지가 될 수 없다.
선각국사 도선은 신라말 풍수대가였다. 그는 '비보(裨補)사상'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비보사상이란 땅이 커 명당이 찾기 쉬운 중국과는 달리 국토가 좁아 명당이 부족한 한반도에서는 승탑과 사찰을 세워 지덕(地德)의 운기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명당을 만들 수 있다는 도선의 개성적인 풍수 사상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전라도에 머물면서 인근에 미우사, 도선사, 운암사, 삼국사를 창건하고 많은 비를 건립했다. 따라서, 호남지역이 설령 배역지라고 하더라도 도선의 의해 명당지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선은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해주어 후삼국의 통일비법을 전수해주었다고 알려진 인물이 아닌가? 배역의 땅을 내버려 두어 왕건의 통일을 방해했을 리 없다.
물론, 왕건과 도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신라말 명망이 높았던 도선의 이름을 왕건 측에서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고승이었던 도선을 왕건과 연결시킨 인물 역시 최지몽이라는 호남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전라도에 불리한 풍수지리사상은 후대에 와서 왜곡되었을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 풍수지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귀신 씨나락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맹신하고 호남차별의 근거로 삼는 부류가 꽤 있기에 부분적으로 반박하는 차원에서 논해 보았다.
4. 호남이 아니라면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어디를 가리킬까?
1) 왕건의 아킬레스건은 궁예
왕건은 후백제와 신라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온후한 왕이었지만 궁예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왕건으로서는 궁예 세력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궁예 세력의 존재는 곧 왕건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건에게 궁예라는 존재는 반드시 지워버려야 할, 그리고 지워져야할 역사의 어두운 과거였던 것이다. 500년 뒤에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를 모조리 배에 태워 수장시키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정통성은 왕권의 명분이자 생명이었다.
2)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친궁예 지역를 가리킨다.
설성경은 '차현이남 공주강외'의 유력한 장소로 친궁예 세력이 밀집해 있던 '홍성·공주·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주·홍성 지역의 반란 사건은 왕건이 즉위한 지 5일 만에 일어났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공주 출신 환선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 · · · ·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즉 태조 즉위 14일째 되던 날에는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또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 · · · 2개월 뒤인 같은해 8월에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이 함께 고려에 등을 돌리고 후백제로 투항해버린다.· · · · 청주 지역 출신 호족세력의 반역사건도 들여다보자. · · · · 이 지역 출신 호족세력은 궁예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일찍이 궁예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후고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그해 7월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던 청주의 민호 1천호, 즉 약 4천~5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다음해인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철원은 청주인을 기반으로 한 궁예의 본거지였다.· · · · 918년 9월에는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서 청주인 임춘길이 같은 고향 사람 배총규와 매곡인 경종 등과 모반을 일으켜 임춘길 일당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에 임춘길·경종 등의 주살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더욱 동요되는 상황에서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그의 동생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3) 친궁예세력에 대한 가혹한 응징
설성경은 연이은 반란이 왕건에게 '생애 최대의 시련'을 주었다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볼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이때 모반사건이 발생한 지역 혹은 반란 주모자의 출신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목천현의 경우를 보면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목천 사람이 자주 배반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우(牛)·상(象)·돈(豚)·장(獐)과 같은 짐승의 이름으로 성을 내렸다"며 이 지역에 대한 왕건의 실제적 응징이 뒤따른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4) '차현이남'의 차현은 차현(車峴)고개? 차령 고개?
한편, 차령산맥으로 오역되어 문제가 되었던 차현이남의 '차현'이 실제 어디인가 하는 점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칠장사(七長寺) 부근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는 설이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청주를 온전히 포함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차유령 고개라고도 불리는 차령 지역이다. 공주에 가까워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공주 근처의 유역이 설정된다.
5)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의 차별은 없었다.
배역의 땅으로 지목된 반란지역 주민들은 항상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받았을까?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태조가 생각한 배역의 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성경의 말에 따르면 "태조는 홍성인 홍규의 딸을 12번째 부인, 즉 흥복원부인으로 삼았고 홍규를 삼중대광에 추증하였다. 또 견훤의 부하로 태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홍성의 성주 긍준은 중용되어 대상이란 관직의 등급에까지 올랐다. 태조의 손자인 현종은 거란 침입 때 공주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 그의 맏딸을 원성왕후로 맞아들였으며, 후에 그녀의 동생 둘도 왕후인 원혜·원평으로 맞아들였다. 태조에 의해 짐승의 성을 부여받았던 목천 사람들은 문종 때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복귀되었다."
5. 가해자의 알리바이
결과에 맞추어 원인을 찾으려는 결과론적 분석을 하게 보면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게 된다. 훈요십조를 근거로 호남차별의 역사성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오류다. 역사적으로 호남이 차별받아왔다는 결론부터 짓고, 그에 걸맞는 자료들만 모아서 자신의 결론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현대에 영남 지역이 차별받았다면 영조시절의 영남 차별을 근거로 삼을 건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미처 이런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경우도 있다. 그들은 호남차별을 오래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호남차별의 원인을 과거로 떠넘겨야 호남차별의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해자격의 지역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에 더욱 쉽게 빠진다. 훈요십조의 호남차별이 가해자의 역사적 알리바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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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아래 @ 2008/09/0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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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이었습니다. 전 왕건의 훈요십조의 그 부분이 혜종의 죽음 이후 정권을 잡은 세력이 혜종의 지지기반이었던 호남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결국 일제에 의한 것이었네요. 이런 잘못된 역사를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고 의심도 하지 않은채 은연중 호남 차별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 우리 역사의 부끄런운 단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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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5 19:43-

- 이 글 쓴다고 반나절은 보낸 거 같아요. 글쓰기가 쉽지 않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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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d @ 2008/09/0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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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제가아는 국사상식으로 훈요십조에 저 조항은 조작된거라고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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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5 20:38-

- 네, 조작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한번 다루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름 설득력있는 논거였었죠. 신라계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훈요십조를 조작했다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룰까 생각했는데 글의 일관성을 저해하는 것 같아 일부러 뺐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조작은 아니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훈요십조를 선전에 크게 이용한 측면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글을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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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우 @ 2008/09/0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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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일제시대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해석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네요..-

감초영 @ 2008/09/05 21:08-

- 네.. 아마 식민사학에 의해 잘못알려진 역사도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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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소리 @ 2008/09/0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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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편수관 이마니시 류의 입장에서는 일부러 호남을 배척해야 할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순신장군과 함께 목숨걸고 싸웠던 호남인들의 정신력과 조국애등이 무서워...
그부분을 좀 더 글로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감초영 @ 2008/09/05 21:47-

- 글 아주 잘 읽으셨다니 저도 글 쓴 보람이 느껴집니다. 호남은 동학의 세가 남아 있었고 또 말씀하신 것처럼 임진왜란 시 충무공과 함께 왜군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이 커서 항일에 적극적이었고 일본에서도 남한대토벌로 호남을 초토화시켰을 정도로 호남을 싫어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니시는 그 스스로 오역을 하고 조작설을 제기했기에 의도성이 있는지 확신하기에는 조심스럽네요. 나중에 좀더 면밀하게 살펴본 후에 관련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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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iafac @ 2008/09/0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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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솔직히 고려부분 공부하면서 이부분을 보면서 항상 불쾌했었는데..(전 광주 ㅋㅋ)이 글을 읽고 정말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유익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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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5 22:29-

- 애먼 왕건이 욕먹었겠네요. ㅎ 사실 왕건은 호남과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말입니다.왕위를 물려준 태자 또한 나주에서 태어났구요. 유익하셨다니 저도 기뻐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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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 2008/09/0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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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정치권에서 흘리는 지역감정 조장하는거에 아직도 놀아나는
우리의 어르신세대들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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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6 12:26-

- 네..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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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하는분? @ 2008/09/0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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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밝히신 건가요?
아니면 어디서 퍼오신 건가요?
어쨌든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초영 @ 2008/09/06 12:27-

- 이미 설성경 신복룡 교수님 등이 주옥같은 글을 남겼고 저는 다만 꿰었을 뿐이죠.. 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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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조띠 @ 2008/09/06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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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하고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kbs드라마 '태조왕건'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글을 읽었습니다! 결국은 외세, 특히 일본놈들의 악질적인 술책이었군요. 그걸 현세에 와서는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기위한 도구로 이용을하고...그것도 40여년 넘는 동안... 다음에는 영조의 영남차별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궁금합니다!^^ 최근에 드라마 이산의 영향으로 '영조'와 '정조'가 많이 각인 되어 있잖아요^^ 또 궁금한게 있는데요. 제 개인적으론 광해군이 제일 궁금합니다. 혹자들은 광해군의 집권기가 길었더라면 이나라의 역사는 많이 바꼈을거다 라구요!(물론 정조도 그렇지만요)당시 초강대국 중국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진정한 실용외교로 국익을 취하려 했지만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를 당하고,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그의 묘는 왕릉이 아닌 어느 야산의 비탈진 산기슭에 있는걸 보고 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궁금해졌구요. 이런건 국사시간이나 어디서도 배울수없는 사실이어서 더더욱 궁금하구요 혹시 자료나 책자를 구해볼수 있는지 아시는 루트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정보도 다 거기서 거기라 궁금증을 달래기에는 한계가 많네요. 그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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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6 12:30-

- 영조와 정조에 대한 이야기도 나중에 글로 올릴게요. 광해군도 굉장히 매력적인 군주였죠. 자료는 아무래도 도서관이 풍부할 거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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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뉘신지? @ 2008/09/06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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휼륲하십니다.
정말 연구가 많이 된 글을 읽었습니다.-

감초영 @ 2008/09/06 12:30-

- 칭찬 고맙습니다. 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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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광모 @ 2008/09/06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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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잘쓰시고 의문이 들었던 내용이었는데 잘읽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써 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 교육계 전반에 걸쳐서 일제의 잔해가 너무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ㅠㅠ-

감초영 @ 2008/09/06 13:02-

- 아무래도 식민지 시절 보급되었던 역사의 선점효과가 커서 문제가 많습니다. 앞으로 역사학자들이 수정해 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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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 2008/09/0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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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고대부터, 시대적으로 정치적 목적에서 특정지역의 차별이 존재해 왔는데,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훈요십조를 들먹이면서 "호남지역은 과거부터 배역의 땅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호남차별을 정당화 하려고 했지요.
조작설이 있는 훈요십조가 설사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근거로 현재 특정지역 차별을 정당화하는 웃기는 일을 하는 셈이지요. 그러한 논리로 현재 다시 풍수지리가,역사학자,정부 등이 나서서 "이 지역은 역사,지리적으로 배역의 땅이다." 그러면 그 지역은 배역의 땅이 되겠군요. 훈요십조가 역사적 사실인지,사실이라면 당시 왜 그러한 내용이 나왔는지만이 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 중요할 뿐. 그 이상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뿐이 안되지요. 한마디로 역사외에는 쓸데가 없다는 말입니다.-

감초영 @ 2008/09/06 12:33-

- 네, 그렇죠. 의도적으로 편향된 자료만 모아놓고 거짓을 유포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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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던이 @ 2008/09/06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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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차별이 박정희때부터 있었습니다. 69,70년대 경제구조는 중화학 경제 였습니다. 예를들어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판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이 없어습니다. 기술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본은 빌려와야죠. 그런데 그때 당시 기업에서는 해외에서 누가 빌려줍니까? 그래서 정부주도로 돈을 빌려옵니다. 이게 차관정치죠. 그러면 기업들은 돈을 빌리기 위해서 기관에 잘 보여야 하니까 정경유착이 심해지겠죠. 그런데 차를 만드는데 비용 100만원 든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돈을 빌려왔으니 이자와 로얄티를 각각10만원씩 줘야한다고 할때 미국이 차를 100만원에 팔 때 우리는 적어도 120만원에 차를 팔아야 합니다. 국내에서는 비싸서 안사고 방법은 수출인데 이때 우리나라는 마법을 겁니다.120만원을 90만원에 팔수 있게 합니다. 저임금 정책이죠. 그런데 임금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에 비용이 필요하게는 줘야합니다. 적어도 식생활은 할수 있게, 그래서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제는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으로 발전했다고 말합니다. 재벌이 잘해서 경제발전 한 거 아닙니다. 그런데 최대의 곡창지대가 전라도죠.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이 완전 망합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경부축중심으로 발전전략을 취합니다. 울산,포항,거제등..그러면서 전라도는 소외되었죠. 그래서 그들은 도시로 올라옵니다. 그결과 도시는 과잉되고 그들은 또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됩니다.
조선시대때는 전라도에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당연히 곡창지대인데. 그런데 산업화이후로 바뀐거죠.
전라도가 차별은 받은시기의 시작은 산업화 이후입니다. 당연히 어떻게 조선시대떄 곡창지대를 차별할까요?
최대한 짧게 쓰려고 했는데 완전 길어졌네요.-

감초영 @ 2008/09/06 12:35-

- 경제적인 요인도 있었고 정치적인 요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박정희 시절에 호남차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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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자 @ 2008/09/0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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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후속 포스트는 그렇다면 호남차별의 기원은 어디인가?의 주제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알기론 박정희 선거운동때부터로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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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6 12:37-

- 호남차별에 관해 쓰는 건 많은 시간과 정력이 필요할 듯 하네요. 그리고 용기도 필요하겠지요. 생각해 볼게요. 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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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혁명 @ 2008/09/06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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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지식과논리.역사많이배웠네요.많은노력부탁드려요..우리역사를 우리역사로만들수있어야하는데..선생같은분이더노력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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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6 12:37-

- 칭찬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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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요.. @ 2008/09/0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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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공주와 강외 아닐까요??
조치원과 청주 사이에 강외면이 있구요 또한 대전과 조치원 인근에 공주도있구요,,
금강도 흐르구요...-

감초영 @ 2008/09/06 12:39-

- 이 점은 생각 못해 봤습니다. 청주 근처에 강외면이란 지명이 있었나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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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발카트 @ 2008/09/0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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뎃글 쓴 사람중에 국가 분열시키려는 반란분자들이 좀 있군요. 국정원은 뭐하나 국가 붕괴 초래하는 이런 사람들 안 잡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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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6 12:39-

- 네 어디에 한두 명씩은 있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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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뒤가 안맞네요 @ 2008/09/0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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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한국인들 좋아하는 일본인 조작론으로 빠지길래 뭔소리래.. 하면서 봤더니 성호이익의 이야기가 등장하네요. 택리지의 이야기도 나오고.. 이중환이야 성호학파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 전라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서 일제가 조작한 것이다 하는 결론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조선시대에 전라도를 배역의 땅이라 불렀음은 여러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잖아요. 그것이 왕건의 의도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일단 보류하고라도 최소한 일제시대 이전부터 그런인식이 있었으니 일본에 의해서 조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죠.
우리나라 사람들 뭐든 일본탓이다 하면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추천하는데 그런 흥미에 맞춘것 같네요.-

감초영 @ 2008/09/06 12:52-

- 저는 조작설이 아니라 오역을 지적한 겁니다. 안타깝네요. 먼저 글 내용을 잘 이해해 줬으면 합니다. 물론, 훈요십조 조작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걸 처음 제기한 사람이 의외로 이마니시였죠. 오역을 하고 그것에 의문점을 느껴 조작설을 제기한 만큼 이마니시가 식민지 분열을 일으키려고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 단정짓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죠. 근데 제 글을 조작론으로 읽으셨다니 황당할 뿐입니다. 그리고 성호 이익은 정치적으로 남인과 많이 밀착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갑신환국 때 유배를 당했고, 그의 형은 남인 장희빈을 옹호하는 상소를 썼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특히 이익은 그의 형으로부터 글을 배웠을 정도로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또 정치적으로 출사하지 못해 한평생 재야로 머물렀던 한이 서린 사람이었고 그것이 차별받은 남인과의 동질감을 느낀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던 이익의 말만 듣고 조선시대의 인식을 알 수 있다고 일반화 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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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네 @ 2008/09/0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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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웃기는군요/.. 무슨 전라도가 동족을 팔아먹은 겁니까?
6.25때 남한이 전투에서 패해서 밀리다밀리다 경상도 쪽으로 밀린것이 어찌 동족을 팔아먹은 행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좀 알고좀 쓰세요.. 아니 가치관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린것 같네요
그리고 무슨 삼국 패권을 차지한 세력이 모두 경상도라..... 그런 말 하는 것 부터가
권력자들이 필사적으로 이용한 지역감정을 다분히 반영하네요-

감초영 @ 2008/09/06 12:56-

- ㅎㅎ 호남에 도덕적 열등감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냥 무시해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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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뒤가 안맞네요2 @ 2008/09/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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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요.. 제가 보기엔 지적에 수긍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글 내용은 훈요십조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오역해서 지금 잘못 알려졌다는 내용이고 댓글중에도 보면 알지만 그저 일제의 잔재니 하는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용하신 자료에도 알 수 있듯이 전라도를 배역의 땅이라고 부른것은 조선시대에도 분명히 있었던 내용이고 최소한 훈요십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은것은 일제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니 일제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이야기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라고 이야기 한겁니다.
쓰신 글의 내용은 일제 조작론이 맞습니다. 그렇게 불릴 수 있어요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최소한 훈요십조를 들먹이면서 전라도를 배역의 땅이니 했다는 것은 최소한 그당시의 훈요십조에 대한 해석이 어땠는가는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중환의 이야기에 대한 반박이나 훈요십조에 대한 또다른 고증에 대한 자료가 없으면 말입니다.-

감초영 @ 2008/09/06 17:47-

- 글에도 이마니시가 오역했다고 썼는데, 조작론이 맞다니...쌩뚱맞은 결론을 지어버리는데 그저 쓴웃음이 나올 뿐이네요. 설득력 있게 부연설명을 좀 부탁드릴까요? 어떤 부분이 조작론이 맞다는 겁니까? 댓글 계속 다시는 걸로 아는데 다음에는 이 부분에 대한 답변 부탁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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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09/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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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제대로 읽지 않고 조작설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관적으로 단정해서 약간 황당하고, 그리고 최소한이라고 하면서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는 약간 이상한 논리를 펴는데 황당하지만...
최대한 선의로 받아들여서 이중환의 생애와 당시의 당파들간의 상황에 대해 추후에 새로 포스팅을 올리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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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지나가다 @ 2008/12/1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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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혼자만의 생각인거 같군요.
차령고개 부분에서는 그저 웃지요.
차령고개 이남이면 그 밑쪽 지역 전부에 해당하는 말인데
(그럼 전라도도 온전히 다 포함되지요.ㅎ)
차령고개 밑에 만 쪼그맣게 빨간원 그려서 범위 좁게하려
는게 눈물겹게 보이는군요..
그냥 훈요십조 알아보려다가 들어왔는데 이런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다는걸 보니 참 신기하군요.ㅎㅎ
역시 세상에는 별에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다 있나봅
니다.
아무튼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수고스럽게 댓글 안달아주셔도 되요..다시 올일
이 없을듯.
P.S 이 글쓴분이 전라도 출신이라면 더 애절함이 뭍어날텐데요..ㅎㅎ 아마 전라도분이시겠죠?ㅎ-

- 그럼 넌 특정당 알바 + 경상도 사람인가? @ 2008/12/1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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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올거면서 글은 뭣하러 쳐달고 있냐?
글쓴이 내용은 사실 KBS역사스페셜에서도 비슷하게 방영된적이 있다..그리고 윗내용도 위에 어떤사람이 언급했다시피 당시 연세대,건국대 교수들이 공동으로 글을 썼던거고..
하여간 이놈의 지방사람들은 왜 맨날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난 인천토박이이자 지금도 구월동에 살고 있다..근데 대학교에서 영남,호남애들 보면 아무탈없이 잘지내더만 왜 인터넷만 들어오면 이래? 다 정치알바들 때문인가?
개인적으로 난 전주 이씨다..우리 시조가 이한이란 사람이야..근데 이 이한이란 분이 집안 대대로 지금 전라도 전주에 살았고. 그 역시 전라도 전주 태생이다..신라로 와서 벼슬을 했지..가물가물한데 아마 통일신라 였을거다..
예전 할아버지께 그렇게 배웠었던 기억이 난다..근데 그 전주 이씨 가문이 향후 조선을 건국하고 500년 넘게 이나라를 지배했지..
결국 핏줄로 따지면 우리나라 사람들 다 전라도 핏줄에게 조선시대 500년이상 지배를 당한거야..웃기지 않냐? 니 족보 거슬러 올라가봐라..전라도 출신 한명이 없나..ㅉㅉㅉ
그리고 영조대왕이 영남을 당시 반역의 땅으로 규정짓고 배척했던건 아냐? 잦은 반란,민란 때문에? 그럼 영남도 같이 까야겠네..
좀 사이좋게 좀 지내..욕 좀 그만하고 자식들아..코딱지만한 땅에서 지역감정이 왠말이야..
미국 같으면 크기상 그냥 같은 주, 같은 고향이야..에휴..
그리고 훈요십조 자체가 일제시대 쪽빠리가 해석한건데 그걸 그대로 믿고 있는것도 사실 웃기잖아?
솔직히 실제로 전라도를 배척했다는 근거도 없어..고려 역사를 봤을때 요직에 전라도 출신들이 널려 있었거든..이제 이런거 그만 좀 하자..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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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8/12/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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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대신해서 좋은 리플 달아주셨네요.^^
네, 조선시대를 통틀어 호남이 차별받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지방 전체가 차별받은 가운데 호남도 차별받았다면 맞는 말이지만요. 조선후기로 접어들수록 권력은 서울에만 집중되었으니 지방은 당연히 배제되어갔겠죠.
조선조에 특별히 차별받았던 특정지역을 꼽으라면 서북지역과 더불어 차라리 영남을 꼽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영조는 이인좌의 난 이후 60년의 재임기동안 영남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했으니까요. 그 이전에도 영남우도는 광해군 시기의 대북파 본거지였다는 이유로 큰 핍박을 받고 있었구요. 따라서 영조시대의 영남차별은 영남우도에 대한 차별이 영남 전체로 확대된 것이라고 봐야죠. 그 이후에도 남인은 계속 핍박을 받았기에 영남차별200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죠.
반면에 호남은 왕조의 관향이었고 조선후기를 주도한 노소론의 텃밭이었던 만큼 정권으로부터 배척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정권에서 소외당한 남인들의 시기를 받았으면 받았겠지만요. 남인계열이었던 이익과 이중환이 호남에 대해 악담을 퍼부은 이유가 실은 여기에 있죠.
어떤 분은 세도정치기의 안동김씨가 경상도 문중이라고 생각해서 경상도 차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수 있는데, 안동김씨라는 이름만 그쪽에서 왔을 뿐 세도기의 안동김씨는 실은 서울에 오래도록 뿌리내린 가문입니다. 따라서 경상도 안동김씨와는 사실상 다른 가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안동김씨를 장동김씨라고 불러 경상도 안동김씨와 구별하기도 하죠.
암튼, 호남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조선조 호남차별설을 퍼뜨리면서 편견을 조장하는데 이건 잘못된 사실일 뿐 아니라, 실제로는 오히려 역사적 사실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언제 시간이 나면 영조시대의 영남차별에 대해 포스트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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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이화 @ 2008/12/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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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이군요. 다음글도 참조바랍니다
http://blog.chosun.com/blog.screen?blogId=68721&menuId=283474-

감초영 @ 2008/12/24 17:14-

- 네 무위이화님 안녕하세요?^^ 포스트를 읽어봤는데 역사적 근거가 자세하고 내공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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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흐흐 @ 2008/12/2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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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전라도 판이었다
궁예가 충북과 경기도,강원도를 기반으로 할때 왕건은 궁예를 피해 전라남도에서 힘을 키웠다. 전라남도 여자와 결혼하여 애까지 낳으면서...
기회가 오자 전라남도와 개성의 군사를 기반으로 궁예를 때려잡는다.
그리고 전라도에게 국사부터 태사,태자,왕후까지 모두 내맡긴다.
국사 도선을 따라서 천자가 태어난다는 천자봉조지상의 전라도 성수산에서 백일 기도를 올리고 고려를 개국한다.
그때 경상도의 상태는?
권력자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가장 천하다는 향소부곡중 부곡고을 407개중 215개고을을 경상도에 지정하는 천민화 정책을 해버렸다.
왕건은 경상도를 완전히 개차반으로 보았다.
나중에 김사미가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군이 경상도지역에서 수년간 반란군 학살을 자행하면서 밀양 오치재에서 시체 뜯어먹는 까마귀가 가득하여 오치재라 불렀을 정도의 학살을 당하고 나중에 경상도가 너무 반발하자 부곡을 풀어주었다.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승려가 최상류층이었다.
주로 왕족과 귀족들이 승려가 된 경우가 많았고 불교지도자를 배출했다.
그당시 전라남도 송광사 출신들이 국사를 도맡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전라도 출신 국사들이 휘둘럿다는 것은 고려의 주요 기반이 개성과 전라남도임을 증명한다.
지금의 조계종은 전남 송광사의 조계산에서 연원한다.-

감초영 @ 2008/12/24 17:30-

- 네, 마지막 줄에 언급하신 것처럼 지금의 조계종은 송광사에서 비롯되었죠. 그래서 송광사가 자리잡고 있던 송광산이 조계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구요. 송광사의 옛이름은 수선사였는데 수선사는 수선사 결사운동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때 수선사 결사운동이라는 선종중심의 불교통합운동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조계종이라는 한국불교의 원류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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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요십조 @ 2009/03/0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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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서 말하는 “차현이남 공주강 밖”에 대해서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훈요십조 중 제 8조]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산지의 형세가 아우르며 내달리는 背逆의 형세로 민심 또한 그러하니 그 곳에 속하는 주현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이나 왕실의 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통합 당한 원한을 품고 길을 치워 난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일찍이 官寺의 노비와 津, 驛의 雜尺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에 붙어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 혹은 왕실이나 궁원에 붙어 언어를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고 마땅히 관리의 지위를 주어 일을 보게 하지 말 것이니라. (원문 :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灾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여기에서 “車峴以南, 公州江外”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자가 있으나 이것은 호남지역이 과거 倭(=마한,모한,임나일본)였고 백제가 이 왜의 속국이었던 역사에서 이곳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삼국사기 온조왕 24년 7월 기사]
24년 7월에 왕은 熊川柵을 축조하니 馬韓王은 사신을 백제로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왔을 때는 발들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방 100여리'의 땅을 갈라주어 편히 살게하고, 王에 대한 대우도 후하게 하였으므로 마땅히 이의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 國家를 완전히 이룩하자 우리를 적으로 대하여 城池를 크게 설비하여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그 義理가 어찌되는 것인가"
하므로 王은 부끄러워하며 곧 熊川柵을 헐어버렸다.
(원문 : 二十四年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宣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與義何. 王慙. 遂壤其柵 )
그런데 여기서 마한은 어디를 두고 한 말인가는 일본서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서기 권 제14 雄略天皇]
20년 겨울에 고려의 왕은 크게 군병을 일으켜 백제를 격멸시켰다. 그 때 소수의 殘兵이 있어 軍資倉 아래 모여 있었다. 兵糧은 이미 떨어져서 깊이 근심하고 울고 있었다. 이에 고려의 諸將은 왕에게 言上하여.
"백제가 非常하다 함을 신은 그것을 매양 보아왔으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失期한다면, 다시금 일어날 것이 두렵사옵니다. 청하옵건데 이 기회에 그들을 추격하여 전멸시키시옵서서."
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은 말하되,
"불가하다. 과인은 백제국은 일본국의 官家가 된 바 유래가 오래다고 들었다. 또한 그 왕이 일본국에 들어가 天皇을 섬기었다는 것은 四隣의 여러 나라가 다 알고 있는 바다."
고 말하였다. 그래서 추격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21년 春 三月에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破하였다는 것을 듣고 "久麻那利"를 汶洲王에게 賜하여 문주왕을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여 부흥시켰다. 때의 사람들은 모두
"백제국은 비록 屬黨은 이미 망하고 軍資倉 아래 모여서 근심하고 있다가 실로 천황의 힘에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었다."
하였다.(문주왕은 개로왕의 同母弟이다. <日本舊記>에 의하면, 구마나리를 末多王에게 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틀린 말이다. 구마나리라 하는 곳은 임나국에 속하는 呼唎縣의 한 邑이다.) (원문 : 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爰有小許遺衆, 聚居倉下, 兵糧旣盡. 憂泣滋深. 於時, 高麗諸將, 言於王曰, 百濟心許非常, 臣每見之, 不覺自失, 恐更蔓生, 請逐際之, 王曰, 不可矣. 寡人聞, 百濟國者爲 日本國之官家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逐止之. 二十一年 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汶洲王,救興其國, 時人皆云,百濟國,雖屬旣亡,聚憂倉下,實賴於天皇,更造其國(汶洲王蓋鹵王母弟也.日本舊記云,以久麻那利 賜末多王,蓋是誤也,久麻那利者,任那國下 呼里縣之別邑也.)
즉,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마한왕이 곧 일본천황이다 라는 것이다.
또한, 마한왕이 내준 금강 이북의 백여리 땅이 곧 “구마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공주를 그곳에서는 "구마나리"라고 한다.
그런데 차령산맥-소백산맥-금강을 이어보면 마치 망나니 칼(=무당칼=驅魔劍)과 같은 모양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이른바 "久麻那利"인 것이다.
즉, “공주강 밖”이라고 한 것은 금강이 북쪽으로 호(弧)를 그리면서 흐르기 때문에 금강의 이북을 말하는 것이다.
훈요십조를 왜곡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彼下州郡人"의 "彼下"를 고려의 도성인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을 가르킨다고 해석하나 그러한 주장은 한문 기술의 ABC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彼"는 "This"나 "That"로 해석되는 것이고 "下"는 "속한다" "포함된다" "관할하에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즉 "彼下"란 "이곳에 속하는"이라는 뜻이지, "저 아랫쪽"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표현은 한문장에 일반화되어 있는 표현방식으로 위의 일본서기의 문장에서도 볼 수 있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 呼里縣之別邑也"에서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아랫쪽"이라는 뜻이 아니고 임나국(임나일본=호남)에 "속한다"라는 뜻인 것이다. 즉 "구마나리는 임나국에 속하는 치호리현의 한 읍"이다라는 뜻이지. "임나국 아랫쪽의 한 읍"이다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車峴以南, 公州江外... 彼下州郡人"이란 "차령산맥 이남에서 금강 외곽(이북)... 그곳에 속하는 주군의 사람"이란 뜻으로 대체로 충청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이곳은 대륙의 백제가 망하면 일본천황이 백제왕에게 이 땅을 주어서 백제를 살려 내는 곳이다. 이곳에 백제의 핵심 유민이 살아 온 것이다.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는 곳 또한 이 지역에 속하는 천안에서였고 지금도 천안에는 후백제 성터가 있다.
왕건이 처음 일어난 곳은 나주 일대이다. 이곳에서 나라를 일으키면서 태자가 나주 출신임을 내세움으로써 손쉽게 호남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견훤은 본래 왜의 영토인 호남에 백제의 간판을 내걸었으니 결국 백제의 핵심세력이 있는 충청지역의 백제 유민세력과 분열 양상을 보이게 되어 견훤은 결국 왕건에게 투항하고 만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했을 때도 지역간 대립이 극심하였다. 처음에 삼남지역이 반기를 들었으나 자신이 전주이씨로 호남출신임을 밝히자 호남과 충청지역의 들끓던 민심은 순식간에 지지로 돌아섰는데, 경상도는 극심하게 반대를 하게되어서 이후 경상도 출신은 타지역 사람들의 보증이 없이는 아예 과거에 응시조차 할 수 없도록하여 경상도의 출사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렸다. 이 결과 경상도 출신으로 처음으로 영의정에 오른이가 조선개국 후 200년 후인 임란발발시에 유성용이 처음이고 송시열 이후에는 남인 즉 영남인은 출세길이 막혀서 찬밥신세였다.
倭는 기원전 700년경에 환국(桓國=辰)을 계승하여 나주를 도읍으로 건국되었고 그 영토는 산동반도 발해만의 요서,요동 만주,한반도 일본열도를 포함하는 대국을 이루었다.
이 왜가 산동반도에서부터 만주 시베리아 대동강 이북까지를 영토로 한 위만조선의 건국으로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였고 이 때 위만조선에 의해 축출된 기자조선의 왕에 의해서 한 때 금강 이북의 영토를 내주면서 마한이라는 국호가 생겨났다.
이것은 여러 사서에 확인된다.
『潛夫論』卷 9 志
옛적 주나라 선왕때 또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고로 시경에 말하되 ‘넓다란 저 한성은 연나라 군사에 의해 다스려 진 바 되었다. 그 후 한후 또한 또한 성씨가 韓이었다. 위만에 의해 정벌된 바 해중으로 옮겨 살았다.(昔周宣王 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侯亦姓韓 爲衛滿所伐遷居海中)
즉 지금의 익산 부근을 도읍으로 “마한”을 건국하였다는 말이다.
마한이 건국된 기원적 200년경 한반도 남단은 여전히 倭였다는 것은 여러 사서의 기록에 나타난다.
[삼국지 오환선비 동이전]
“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쪽, 서쪽을 바다로 경계를 하고 있으며 남쪽은 왜와 접하고 둘래가 4천리이다.”(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
“韓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다. 그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쪽은 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다.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고 그 남쪽은 역시 왜와 접한다.”(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호남은 본래 환국, 일본, 박달, 배달 등으로 불려왔습니다. 본래 일본은 바로 호남을 말하며 또한 倭는 이 호남의 왜에 의해서 건국되었음을 사서는 적고 있습니다.
[구당서]
일본국은 倭국의 한 나라이다. 그 나라는 해(금강 이남)의 끝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했다. 또한 왜국이 그 이름을 스스로 고상치 않다고 하여 일본이라 바꾸었다 한다. 또한 일본은 예석에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 한다.(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즉 나주를 초기 천년 도읍으로 하였던 대륙의 倭와 이의 속국인 백제와의 관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 밖”입니다.
또한 백제, 신라, 가야는 倭의 속국입니다.
-양서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相去萬里,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馬韓亦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相呼皆爲徒,不與馬韓同.又辰韓王 常用馬韓人作之,世相係,辰韓不得自立爲王,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신라는 본시 진한의 종족이다. 辰韓은 또한 秦韓이라고 한다. (양나라)와 만리 거리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노역을 피하여 마한으로 투항해 오자 마한은 또한 그 동쪽 땅을 떼주어 그곳에 살게 해 주었다. 秦나라 사람이었으므로 그곳을 秦韓이라 하였다.....서도 모두를 부르니 무리를 이루었으나 마한과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辰韓王을 항상 마한인으로 하여 계승하게 하였으므로 진한은 스스로 왕을 세울 수가 없었는데, 유이민인 이유에서 였다. 그래서 항상 마한의 다스림을 받았다.
-남제서 권58
建元元年, 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鎭東大將軍.
건원원년 왜왕 무에게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 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을 제수했다.
-양서 권54
除武持節都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鎭東大將軍
양나라 황제가 왜왕 무에게 <지절도독 왜,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진동대장군>직을 제수했다.
-북사 권94 왜국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竝仰之恒通使往來
신라 백제는 모두 왜를 큰 나라이고 진귀한 물건이 많다고 여겨 항상 우러러보며 사신을 보내 왕래한다.
-수서 권46 왜국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竝仰之恒通使往來
신라 백제는 모두 왜를 큰 나라이고 진귀한 물건이 많다고 여겨 항상 우러러보며 사신을 보내 왕래한다.
-송서 권97
弟珍立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중략) 二十年, 倭國王濟遣使奉獻, 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二十八年, 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將軍如故. (중략) 興死弟武立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중략)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 躬甲跋涉山川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중략) 而句驪無道, 圖欲見呑掠抄邊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擧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왜왕이 죽고 아우 진이 왕위를 이어받아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받쳐왔다. 스스로 자칭하기를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며 표를 올려 벼슬 제수해 주시기를 구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했다. (중략) 이십년에 왜국왕 제가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자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을 삼았다. 이십팔년에는 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를 삼고, 안동장군의 칭호는 그대로 두었다. (중략)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서서 스스로 자칭하기를 <사지절도독 왜 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했다. (중략) 순제 승명 이년에 왜왕 이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기를, "나라를 궁벽하고 먼 곳에 봉해 받아서 밖의 번신이 되오니 옛날 조상 때로부터 내려오면서 몸소 병기를 들고 산과 내로 돌아다니기에 편안한 곳이 없었읍니다. 동쪽으로는 모인 55국을 정벌했고, 서쪽으로는 중이 66국을 항복받았으며, 바다를 건너 북쪽 나라 95국을 평정하여 왕의 도가 무르익어 태평하고 땅을 넓혀 서울이 까마득히 멀어졌읍니다. (중략) 구려(고구려를 의미)무도해서 우리 나라를 삼키려 하여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매양 일이 막히고 거슬리어 어진 풍속을 잃고 있아오니 비록 나갈 길은 있다고 하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신의 아비 제가 실로 이들 침략하는 원수를 분히 여겨 중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백만의 활을 당기자 의리의 찬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했았더니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일을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에 무너지고 말았읍니다. 이로부터 신은 양암에 거처하여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싸워 이기지 못했읍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사와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라고 했다.-

감초영 @ 2009/02/27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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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사료가 적은 고대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무리한 상상력은 가급적 피하고자 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나주 왜 기원설 혹은 호남 왜 기원설은 저도 상당히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본측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이 아니라 거꾸로 호남에 왜의 본국이 있었고, 중국과 일본에 진출해 왜의 분국을 건설하고 경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왜라는 국가가 실상은 한반도에 자리잡고 있었고 고구려와의 더불어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었던 국가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죠. 나주에 있는 규모 큰 고분이라던가 역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왜의 빈발한 출현 등 역사적으로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훈요십조의 부분과 나주왜설을 연관시키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글에 적었다시피 왕건과 나주세력은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제와 왜의 관계가 상하적인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연합관계 혹은 혼인관계에 의한 통합국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죠. 초창기 주도권은 왜가 쥐고 있었지만 차츰 북방이민족인 백제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쇼토쿠 태자가 등장하기까지 일본에서는 백제 외척이 상당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 왜와 백제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겠죠. 암튼 얼마전 해남에서 삼국토기가 동시에 출토되는 등 고대사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습니다. 재밌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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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요십조 @ 2009/02/28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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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답글을 보게될지 예상하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정성어린 글을 보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제가 때로 倭의 내부의 사정으로 약화되었을 때 독립성을 지닌 것이 맞습니다. 사서에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北史]
'百濟'는 대개 '馬韓'의 속국이었다. (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
이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백잔과 신라는 옛적에 신민이었던 이유로 조공을 해왔으나 신묘년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新羅以爲 臣民)
기록에 의하면 倭는 기원후 2세기에 극심한 내란을 겪었고 이를 수습한 분이 "히미코"여제인데, 이분이 백제와 신라를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백제와 신라는 倭의 내분 중에 독자적 행보를 하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 복속되었고, 신라는 고구려에 의지하여 倭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을묘년 백잔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갔을 때 신라가 사자를 보내아 왕에게 고하여 말하되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부순 까닭에 노객은 왕의 백성이 되었으니 왕께 돌아가 명을 청하옵니다 하였다.(乙亥年百殘違誓與倭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
그리고 마한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사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한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後漢書 ]
한에는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두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오십사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쪽은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이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 또한 왜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백제는 그 중 한 나라였다.
큰 나라는 만여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여 있다. 땅은 그 둘레가 사천여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 辰國이다. 마한이 최대이며 마한인으로 진왕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삼한의 총왕이다. 그 모든 나라의 왕은 먼저 마한인이었다.
한나라 초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천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 이후에 멸절되어 마한인이 다시 진황이 되었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 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 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 皆是'馬韓'種人焉.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위의 기록을 보면
"백제는 그 중 한 나라였다(伯濟是其一國焉)"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백제는 마한의 소국으로써 태생적으로 왜의 속국이었습니다. 또한 기자조선의 준왕이 마한을 세우기 이전의 왜가 한 때 충청 경기 지역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복국가 시대에 흔히 있는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왜와 백제의 관계에서도 백제가 왜와 등을 진적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백제는 왜의 속국으로 역사를 써내려 갔습니다.
님께서는 왜와 백제의 관계와 훈요십조의 "차령이남 공주강밖"의 연관을 주저한다고 하였으나 700년경까지 백제의 부흥운동이 계속되었고 900년경에 후삼국이 정립하게되는데 200년의 시차로 백제유민의 정서가 희석되었으리라 봅니까. 현대에 들어서도 나라가 병합된지 몇백년이 된 후에 독립한 나라가 여럿이고 또한 지금도 독립을 위해서 싸움을 벌이는 나라가 한 둘이 아니지요. 그런데 고대에는 더욱 그렇지요. 특히 패망한 왕족이 있는 곳은 그 열망이 또한 대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왕건이 처음 일어난 곳은 나주 일대입니다. 이곳에서 나라를 일으켜 태자가 나주 출신임을 내세움으로써 손쉽게 호남을 장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견훤은 본래 왜의 영토인 호남에 백제의 간판을 내걸었으니 결국 백제의 핵심세력이 있는 충청지역의 백제 유민세력과 분열 양상을 보이게 되어 견훤을 결국 왕건에게 투항하고 만 것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했을 때도 지역간 대립이 극심하였습니다. 처음에 삼남지역이 반기를 들었으나 자신이 전주이씨로 호남출신임을 밝히자 호남과 충청지역의 들끓던 민심은 순식간에 지지로 돌아섰는데 경상도는 극심하게 반대를 하게되어서 경상도 출신은 타지역 사람들의 보증이 없이는 아예 과거에 응시조차 할 수 없도록하여 경상도의 출사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이처럼 왕조시대에 유민의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님께서 "차령이남 공주강밖" 즉 구마나리에 대해서 의아해 하시는 것이 저로서는 조금은 수긍이 되질 않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일본서기를 해설하여 구마나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싶은데 지금은 시간이 없군요.
젊은 분 같은데 많은 공부를 하신 것 같군요. 정성어린 글 잘 보았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르신들께서 백제,신라,가야가 왜의 속국이라는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수긍이 되지 않더군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옳은 것이었습니다. 훈요십조의 차령이남 공주강밖의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을 지역민들이 몰라서 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속에 감추어진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자제한 것뿐입니다. 전남의 고분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 왜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는데 이는 백제, 신라,가야가 왜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왜에 조공을 한 물건들이 고스란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올리신 지도의 산맥도가 옳은 것입니다. 차령산맥과 소맥산맥이 "ㄱ"자 처럼 붙어 있읍니다. 즉, 차현이란 바로 차령산맥+소백산맥입니다. 지도를 찾아서 차령산맥-소백산맥-금강을 이어서 그 모양을 살펴 보세요. 그러면 그 땅모양이 의미를 둘만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남인으로 호남을 비방하려고 허접한 지리지를 쓴 것입니다. 대개 지리지라면 내용부터가 방대한데 택리지는 질이나 양면에서 지리지 반열에 올릴 수 없는 팜플릿 정도의 개글이지요.
조선실록에 일부 호남을 비방하는 글이 있는데 이런 것도 또한 당쟁이 와중에 위변조된 개글들이지요. 영남은 한국인과 혈통이 전혀다른 스키타이흉노족이 세운 신라의 유민이라는 한계성이 있어서 남북국시대 말고는 계속 탄압받고 왕따를 당해온 사람들이라 호남을 많이 원망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北史]
신라는 이전에 辰韓의 종족이다. 나라는 高麗의 동남쪽인데 漢나라 때 樂浪 땅이다. 辰韓은 또한 秦韓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도망자들이 노역을 피하여 투항하여 오자, 馬韓은 그 동쪽의 땅을 나누어주어 그 곳에 살게하였다. 秦나라 사람들은 까닭에 秦韓이라고 불렀다. 그 언어와 사물을 부르는 말이 中國人인과 비슷한 점이 있었는데 "나라"를 "邦"이라 하고,"활"을 "弧"라 하고, "도둑"을 "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다"를 "行觴"이라 하고 "서로 서로 부르는 것"을 "徒"라 하였으니 마한과 같지 않았다. 또한 진한왕은 마한인으로 세워서, 세세연연 서로 이어져, 진한은 스스로 임금을 세울 수 없었는데 그 이유를 밝히면 유이민인 이유였으니 항상 마한인의 다스림을 받았다.(본문 :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地.'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投適, '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위의 사료에서 보듯이 호남인이 신라인들의 임금으로 있었으므로 호영남의 대립은 결국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본래 북경 인근에서 만리장성의 노역에 동원된 노예들이었는데, 만리장성 노역은 한번 들어가면 그곳이 무덤이되었으므로 도망이외에는 살아나올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도망쳐온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서를 보면 마한인은 신라인을 노예로 부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후예로 자부하는 영남인들에게 호남에 대한 한이 첩첩이 쌓일만도 하지요
한동안 훈요십조에 대한 글이 사그러들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또 많이 등장해 있군요. 임의 글을 다른 포털에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내일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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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9/03/01 21:19-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훈요십조님의 방대한 자료와 정리를 통해 많이 배우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의견을 가진 부분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구요.^^;; 아마도 소스가 적어 다양한 가정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거에요. 좋은 글 잘 읽었구요. 바쁜 시간 쪼개서 답글 달아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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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 @ 2009/03/01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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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십조님의 견해가 옳아요. 식민사학자들에 고대사가 왜곡된 이 후 그것을 그대로 답습했고, 이것을 또한 영남정권에서 이용을 했지요. 예전에는 "차현이남 공주강외"를 아예 뒤의 "공주강외"를 잘라내어 왜곡에 앞장섰지요. 그리고 한반도의 倭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요즈음 젊은 학도들 중심으로 倭를 올바로 규정하는 작업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요.
역사는 더 이상 왜곡된 모습으로 방치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훈요십조님, 감초영님 간만에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초영 @ 2009/03/02 19:51-

- 역사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고대사의 경우는 사료가 적어 사실이 뭐다 라고 섣불리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컨대, 마한의 경우 흔히 서남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최치원은 마한을 고구려라고 말했죠. 기존의 통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상충되는 내용이 고대사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대사 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100%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 두고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암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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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생각엔. @ 2009/04/1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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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산맥이 없다는건 맞습니다.
차령산맥은 100년전 일본사람이 자기 멋대로 만들어놓은 산맥입니다.
하지만 차령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나오죠.
"충남 예산군 신양면(新陽面)과 공주시 유구읍(維鳩邑) 경계에 있는 고개"
산맥이 없다 뿐이지. 차령이 없는건 아니죠.
글구 '금강이외'도 수도 송도에서 봤을 때 바깥이니까 호남이 맞죠.
왕건 입장에서 강 바깥이라고 말하면 강건너를 말하는거 아닙니까?
강북에 사는 사람이 강바깥이라고 하면 강남을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훈요십조의 "차령이남 금강이외"는 호남이 맞습니다.-

- 글쎄.... @ 2009/06/1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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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훈요십조 자체가 님 말처럼 일제시대때 일본 역사 학자가 지멋대로 해석해 놓은것이라 신뢰성이 떨어지는것이고..(차령산맥도 존재하지 않음.날조.)
게다가 KBS 역사스페셜(그냥 역사 다큐였나?)에서도 나왔었고..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한것처럼, 왕건이 가장 신뢰했던 측근들에 후백제, 호남 출신들이 가장 많았고, 왕건이 직접 후임으로 지목한 혜종때도 호남 출신 인사들이 득세한것만 봐도
사실 훈요십조 내용은 후에 왕건과 혜종의 최측근이었던 호남 출신 인사들을 축출하려던 정종의 세력들에 의해 조작이 됐거나 엉터리라고 할 수 있음..
훈요십조를 직접 받았다는 박술희도 정종에게 살해당했고..고려사에는 왕규가 살해했다고 나오지만 역사학자들 말대로 말이 안됨..왕규도 당시 갑곶에 유배됐었고 얼마후 정종의 명령해 의해 살해 당했는데..-_-;;
저 위에 어떤 놈은 지역 감정 조장을 목적으로 짓거리는놈도 보이는데..그런걸 떠나 훈요십조 내용 자체가 너무 앞뒤가 안맞는 엉터리가 많음..
그러니 TV에도 나왔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반박당하는것이고..일단 나는 이걸 일제시대때 일본 학자놈에 의해 해석됐다는것 자체가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보고 짜증까지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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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 @ 2009/04/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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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분님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차령이남 금강이외 가 전라도가 아니라는 건가요 ㅋㅋㅋ
역사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추측하는건 좋지만
검증되지않는 사실을 말하지마십시요..
이 부분은 확실히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게 호남지역입니다..-

- 풋...놀고 자빠 졌네... @ 2009/06/1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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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교수 중 아는 사람은 있냐? 근대 후 현대에 이르러 역사 학자들의 대다수가 엉터리라며 부정하거나 최소한 일정 부분 이상 조작 됐다라며 지적하는게 훈요십조다..
이건 예전 KBS 역사스페셜인가 그냥 역사 다큐인가를 통해서도 서울대 역사학 교수등이 철저히 반박을 했지..엉터리라고..
훈요십조를 일제시대때 일본 학자가 해석, 정립했다는건 둘째치고 정말 말이 안되는건 당시 권력 중추를 보면 알 수 있다..글쓴이도 이미 말을 했는데
왕건 자체가 수많은 왕자들 중에서 현 전라도 나주 출신의 왕비 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줬다..
현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이 국사로 등용되고, 역시 현 호남 출신 최지몽을 책사(나중에 살아서는 상주국, 죽어서 태사로 추증)로 하는등 권력 중추의 반이상을 현 호남 사람들이 차지한다.
너 최지몽 등 대부분이 왕건이 직접 등용한 최측근 인사라는건 아냐? 최지몽은 완전 천재였고..훗날 혜종이 왕규에게 살해당할뻔 했을때도 그 뛰어난 두뇌로 구했지..
여하튼 역시 재상에도 후백제(현 호남)출신 박제술을 재상으로 가까이에 두지.
고려의 역사적인 문록 어디를 찾아봐도 호남이 권력에서 배척당했다는 목록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현 호남 출신의 왕비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후임 권력 중추의 태반을 호남 출신 인사들에게 맡기고 숨을 거둔 왕건이 호남 출신을 기용하지 말라고 했다?
본인 조차도 현 호남 출신 인사를 대거 기용해서
가장 신임을 했는데? 이게 말이 돼?
KBS 방송에 나왔던 그 역사학 교수들은 이것보다도 더 훨씬 논리정연하게 훈요십조가 엉터리 라는걸 지적하더군..그 누구도 반박도 못하겠더라..이것도 나왔던 내용인데..
왕건에게 훈요십조를 직접 건내 받았다고 기술돼 있는 사람이 박술희 라는 사람이다..근데 왕건은 다른 부인들에 비해 권력이 약했던 나주 오씨를 위해 왕건의 최측근 중 하나였던 이 박술희를 나주 오씨에게 붙여줬다..태조는 죽기전 박술희에게는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했다..혜종 즉위의 일등 공신 중 하나지..
박술희를 오씨에게 붙여주며 나주 오씨와 혜종이 훗날 해코지 당하지 않게 각별히 신경쓴 왕건이 훈요십조를
박술희에게 내려 오씨와 혜종의 권력 기반이라고 할 수 있고,
왕건 본인조차도 가장 신뢰해 혜종에게 대거 붙여줬던 호남 출신 인사들을 훈요십조를 통해 까면서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어떤이는 훈요십조가 일제시대 일본 학자가 해석, 정립한것에 의거해 일부러 혹은 멋대로 해석됐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문구가 설사 존재했더라도, 당시 혜종과 왕규의 잔존 세력을 모두 척결하려던
정종 세력에 의해 훈요십조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거의 100%지..이건 그 방송에 나왔던 역사학자들도 그러더라..(혜종은 시해 음모에 엄청나게 시달렸지, 박술희등도 결국 살해당했고)
고려 시대사에서 후백제, 호남 출신 인사들의 기용이 뜸했던 유일한 시기가 바로 이 정종과 그의 친동생
광종 때였다..훈요십조를 조작해 그것을 이유로 배척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지..아니,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그게 진실이라 생각하더구만..
물론 애초에 그 일제시대 일본학자의 엉터리 조작된 해석일 수도 있는것이고..존재하지도 않은 차령산맥을 등장시키질 않나..ㅎㄷㄷ
정종은 지가 박술희를 죽여놓고 왕규에게 뒤집어 씌운 간사한 인간이였지..이건 역사학자들도 다 수긍한다..왜냐하면 당시 왕규도 갑곶에 유배되어 박술희 죽은 뒤 얼마 후 정종에 의해 살해당했거든..
고려사에는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다고 나와있는데 상식적으로 왕규가 죽였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여하튼 이런걸 딱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
오히려 논리적으로 전혀 앞뒤가 맞지않고 내용이 정확히 검증 조차 되지 않아 대다수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건 그 훈요십조라는 걸 알아라..
고려 역사 문헌 뒤적거리다가 이상한 글이 있길래 긴 글 남기고 간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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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영 @ 2009/06/12 21:08-

- 좋은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혹 전라도 폄훼의 목적을 가지고 리플을 다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그냥 무시하세요. 그 어떤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형편없는 글들 뿐인 걸요. 그런 자들의 수준을 쉽게 알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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